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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70년대의 망령

박완서 저 ‘살아 있는 날의 시작’ 

  • 기사입력 2023.12.26 18:24

독서모임에서 박완서 작가의 책을 골라 읽어오기로 했다. 국내 작가 중 가장 애정하는 분이 박완서 작가다 보니 얼마나 설렘이 둥실했나 모른다. 그래서 안 읽어본 작품 중에 집어 든 게 바로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독서 내내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른다. 잊고 있던 70년대 말 가부장제의 망령 때문이었다.

(세계사)
(세계사)

책의 내용은 대학교수인 남편 인철과 자녀 셋을 둔 청희의 이야기다. 청희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살뜰히 모시고 미장원과 미용학원 운영도 실력 있게 해낸다. 문제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우월하게 느껴지는 청희를 억압하고 무시하는 남편 인철이다. 사실 청희와 인철은 같은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고 청희가 먼저 전임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길길이 뛰며 여자를 못살게 군 건 남도 아닌 남편 인철이었다.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남편은 아내를 마치 허위사실 유포죄 다루듯 심하게 다루었다. 결국 그 여자는 그런 심적 고문을 견디다 못해 그 자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소문이 진짜가 되어서 나타날 것인지 헛소문으로 끝날 것인지 끝내 확인할 길이 없었다. - 50p”

남편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강사 자리를 그만둔 청희는 기술을 배워 미장원을 열고, 그 일이 잘되어 미용학원까지 번성했더니 이제 남편은 그마저도 모욕적으로 느낀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 시대의 남성에게 성공한 여성은 앞길을 막는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내는 집 밖에서 돈벌이를 하면서도 결코 한 번도 집안일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다. 여편네가 집에 붙박이로 들어앉아 비와 걸레와 돈지갑과 시장바구니를 번갈아 손에서 떼지 않고 부지런 떨고, 잔소리하는 보통 집구석하고 별로 다르지 않게 모든 일은 예사롭게 돌아갔다. (중략) 여자가 집안일 외에 일을 가지면 집안일은 엉망이 되어야 옳았다. 그건 곧 여자는 집안일 외에 따로 일을 가질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되니까. 아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공치사 한마디 안 하다니, 아내가 그런 독자적인 유능함으로 그를 모욕하고 있음이 아니랴. - 193p”

이런 70년대 남편의 속내를 읽어가면서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 해도 비위가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돈을 잘 벌어도, 집안일을 잘해도, 배우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도 모든 게 남편에겐 불쾌한 요소다. 하지만 작품 속 남편은 돈을 잘 벌지도, 집안일을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배우자의 심기를 번번이 더럽힌다. 아내의 미장원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를 겁탈하고도 남편의 외도를 넘기지 못한다며 아내의 뺨을 때린다. 그럼에도 집구석에서 당당했던 이유는 가부장제의 황금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시대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썼으리라 생각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 입지로나 모자랄 게 없는 청희가 남편과 시어머니, 자식에게도 무시와 억압을 당하는 모습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보여준다. 청희는 화 한 번 걸출하게 내지 못한 채 가부장적 사회에 지배당한다. 읽는 동안 욕지기가 밀려오는 만큼 쓰는 사람 역시 얼마나 비위가 상했을 것인가. 반대로 속에 꿍쳐둔 욕지기를 배설하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상 좋아졌다’는 비아냥을 끔찍이 싫어한다. 아직도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구석이 도처에 깔렸는데, 한두 가지 개선된 것으로 문제를 눙치고 넘어가려는 자세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말 같아서다. 그래서 70년대 후반의 썩어빠진 가부장제가 드러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현시대에는 이런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망령처럼 남아있는 잔재까지 없어지지 않았음을 한 번쯤 언급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현시대의 망령은 워킹맘이다. 워킹맘은 당연하다시피 흔하지만 워킹파파에게는 유독 ‘위대한 찬사’가 붙는 현실에서 나는 가부장제의 잔재를 읽는다. 희생의 아이콘으로서 워킹맘이라는 지위에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 세대에게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늘 부족하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청희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런 청희에게 시원스런 보복을 기대했지만, 그는 꾸역꾸역 집에서 버티는 남편을 피해 짧게나마 속초로 여행을 떠나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 여자는 돌아갈 집이 있고, 만일 남편이 그동안 변심해서 그 집을 주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벌면 새로 장만할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지금 나온 걸 실감하는 집은 그렇게 돌아갈 수 있거나 장만할 수 있는 집이 아니라 미풍양속이라는 여자들만의 고가였다. - 488p”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나지만 나는 나대로의 상상을 펼쳤다. 여행에서 돌아와 리프레쉬한 청희가 외도하고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자녀들에게는 시시비비를 가려 제대로 교육하고, 가정에 기여도를 계산해 재산분할을 똑똑히 해내는 청희를 기대했다. 사오십 년 전 시대를 그려낸 소설을 읽으며 얹힌 듯 괴로워한 나는 2023년에도 둥둥 떠다니는 가부장제의 망령을 이따금 목격하고 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은 오랜 시간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회의 견고한 틀 속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저자 박완서는 한국문학 최고의 유산이라 일컬어지는 작가로 1970년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2011년 타계하기까지 쉼 없이 창작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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