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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복제된 세상에서는 가해자도 복제돼 있다

딜루트 저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 기사입력 2023.12.11 13:24

‘혜지’라는 사람의 이름이 게임에서는 욕으로 통한다는 건 소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을 읽었을 때 알았다. 당시 충격이 꽤 커서 검색도 해봤는데 실제로 그 이름이 게임판에서 욕으로 쓰이고 있었다. 어째서 누군가의 이름이 타인을 그것도 여성을 딱 집어 멸시하는 단어가 됐을까. 그때 이런저런 검색을 하며 알게 된 책이 게이머 딜루트가 쓴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였다. 

(동녘)
(동녘)

‘혜지’라는 단어 하나에 속이 벌렁거릴 정도였으니 게임판에서 흉흉하게 벌어지는 성차별은 얼마나 심할까. 궁금한 마음에 열어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는 예상보다 지독한 게임판을 보여줬다. 

게임인데, 그저 신나게 놀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일 뿐인데, 게임판에서는 그게 용납이 안 됐나 보다. 그 안에서 여성은 성적 도구화가 되고 자의와 관계없이 연애 대상이 되고 페미니스트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는다. 게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이기에 아름다운 꿈처럼 생각해왔지만, 실제로 그 속을 경험한 자의 입을 통해 바라본 게임판은 솔직히 ‘더러운 세계”였다.

“진행자가 게임 속 여성 유저의 전체 비율과 여성 인구가 많은 특정 서버를 언급하며,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도 <파이널 판타지>를 통해 솔로 탈출했다’는 발언과 ‘중매게임’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며 여성 유저를 같은 게이머가 아닌 단순 연애 대상으로 취급했다. - 33p”

“우연히 카메라가 관람석에 앉아 있는 여성을 클로즈업하면, 자신이 찍히는 것을 알아채고 스스로 얼굴의 일부를 가리거나 카메라를 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유는 뻔하다. 여성 관람객이 TV 화면에 잡힐 때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익명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말을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 몇 초만 카메라에 비쳤을 뿐인데도 예쁘면 예쁘다는 이유로 성희롱을 듣고, 못생겼으면 못생겼다는 이유로 야유와 성희롱을 함께 겪어야 한다. 심지어 이런 식으로 얼굴을 가리는 여성 관람객의 수가 늘자, ‘뭐 잘났다고 얼굴을 가리고 다니냐. 그럴 거면 직관하러 나오지 마라’ 같은 소리를 한다. 얼굴을 가리도록 원인을 제공한 게 자신들인데도 말이다. - 36P”

“<프린세스 메이커5>의 결혼 엔딩 상당수는 딸의 능력치가 아무리 높더라도 결혼한 순간 남편 혹은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하는 여성 캐릭터를 보여줄 뿐이다. ‘남편이 행복하기 위한 길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남편의 곁에서 남편을 돕는 것’이라는 딸의 대사는, 게임 속 배경인 현대 일본의 모습과 겹치며 결혼한 현대 여성에게 무엇이 암묵적으로 요구되는지 보여준다. - 124P”

책 속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수없이 공개된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게임은 아름다운 꿈이 아닌 비겁한 현실이었다. 내가 사는 현실을 축소한 작은 세상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결혼하면 당연하듯 ‘희생’을 강요받는 여성의 삶이라든가, 어디에서든 쉽게 벌어지는 외모 품평, 오프라인 커뮤니티에서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추근거리고 호감을 사지 못하면 상대를 모독하는 문화가 게임판에서도 다부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업계라고 자정작용에 힘을 쓰는 모양새도 아니다. 여전히 수많은 게임 속에서 여성은 남성 주인공의 성취에 따른 보상이 되거나 그의 어머니 혹은 아내다. 격투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헐벗고 나와 흔들리는 가슴을 강조하는 바스트 모핑을 선보인다. 페미니즘을 주장하거나 페미니스트와 교류했다는 이유로 일러스트레이터들은 해고당했다. 살면서 줄곧 겪어왔던 성차별의 경험은 게임판에 복제돼 또다시 여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면 또 “그깟 게임, 싫으면 관두면 그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속된 말로 대변도 더러우니 피한다면서 말이다. 대변은 무생물이라 살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피하는 게 맞지만, 상대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다르게 다뤄야 한다. 재미있게 놀고 싶어서, 취미 생활로 즐기고 싶어서 하는 게 게임이다. 그러니 더욱 피해자는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게임을 관두더라도 괴롭히는 가해자가 관둬야 한다. 괴롭힘으로부터 도망치라고 말하는 건 성폭력 피해자에게 옷을 얌전하게 입어라, 일찍 귀가해라, 남자를 조심해라, 라며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던 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여성 게이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건 미약한 힘으로 손을 내미는 게임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게임이 출시되고, 헐벗지 않고 옷을 필요한 만큼 챙겨입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다. 남성의 영웅담에 열광하는 하나의 선택지에서 여성의 영웅담도 추가된다. 이처럼 복제된 세상 속에서 도전하는 평등에 나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때 사천성 게임에서 신 등급까지 올랐던 게이머 경력자로서 게임 속 평등을 세우는 그들의 건축물에 대가 없는 벽돌 하나 꼭 얹고 싶은 마음뿐이다.

“우리에게는 누군가의 보조적인 역할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좀 더 많은 여성 캐릭터들의 서사가 필요하다. 마법을 쓰고 용이 날아다니며 요정들도 살고 있는 게임 속 세상에서 이루어지기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도 아니지 않나. - 235P”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는 여성 혐오가 공기처럼 스며든 온라인 게임판에서 기어이 좋아하는 게임을 찾아나간 한 여성 게이머의 플레이 스토리다. 

저자 딜루트는 MS-DOS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게임을 한 게이머로 웹진 <더핀치>에 게임 관련 리뷰 〈어떤 게임이냐 하면〉과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게이머〉 시리즈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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